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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문학

캄캄한 겨울밤에 읽는 「일곱 해의 마지막」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에 나온 장편, 김연수 작가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이틀에 걸쳐 다 읽었다.
어젯밤에 첫 20페이지 정도를 읽고 잠들었다가 오늘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됐다.

   캄캄한 겨울밤을 연상하게 하는 이 소설을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고 이끌어가고 끝냈을지 상상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겨울밤, 아무도 없이 혼자 숲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을까. 그런 고요와 고독 속에 겸허히 침잠해 들어갔을 작가의 용기와 노고에 독자는 마음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다.

   김연수 작가도 이렇게 먹먹한 독자의 마음으로 시인 백석의 삶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작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용기를 내고, 그런 고독을 감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사랑해 마지않았던 김연수 작가님의 전작 장편들 밤은 노래한다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여름의 청명함을 닮았다면, 청춘의 열기와 주체하기 어려운 열정들을 담고 있었다면, 일곱 해의 마지막은 그런 뜨거운 시절을 다 지나고 이제 고요히 나리는 눈을 미동도 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는 장년의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과 함께 늙어가는 느낌, 그런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일곱 해의 마지막이 노쇠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의 푸름을 활활 불태워서 이제는 하얗게 바스러지는 재로 남은,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했던,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시로 쓰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발버둥 쳤던,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세월의 한계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전작들보다 더 뜨겁고 생생하게 타오른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해방 이후 전쟁을 겪고 그러고 나서는 자유가 없는 나라에 살았던 비운의 시인 백석의 삶을 상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백석 시인은 필명보다는 본명인 "기행"으로 지칭된다.

 


   기행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시인으로 살며 권력이 원하는 글을 써야 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장악해버린 그 사상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보고 느끼고 듣는 대로 표현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들으라는 대로 듣고, 보라는 대로 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라는 대로 말해야만 했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해빙기를 맞은 러시아 문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시를 읽고, 자신의 시를 비밀리에 그들에게 보내기도 하며, 기행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몰두하는 언어의 세계에 자유를 맞이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삼수"라는, 눈이 많이 내리고 겨울이 아주 긴 고장으로의 유배였고, 그는 그곳에서 스스로 시인이기를 거부하고, 키만큼 쌓여 앞을 가로막는 눈처럼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는 현실 앞에 무력해진 채로, 양을 기르고 젖을 짜는 일에 몰두하며 늙어간다.

   김연수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박제당한 듯하다. 50년대의 북한에서 시인으로 살았던 백석의 삶에, 작가가 언어로써 창조해낸 그 시인의 고통에, 2020년을 사는 독자가 이토록 동요하고 동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삶이 사람에게 주는 고통이라는 것은 그 형태와 무게에 한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쓰고 싶은 대로 시를 쓸 수 없는,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혼에 실패한, 청춘을 함께 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가족과 떨어져 첩첩산중에 유폐된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질감은 그 시대나 상황을 겪지 못했다고 해서 그려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의 그 모든 고통,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사는 각자의 십자가, 사랑하는 이를 잃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하고, 혹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의 굴레에 목메고, 끝날 것 같지 않는 감염병의 유행 앞에 무기력해지고,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하는 캄캄한 겨울밤과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통에 충분히 빗대어 봄직하기 때문이다.

   환한 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숲 한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오두막에 갇힌 채로, 마른 나뭇가지에 눈 쌓이는 소리만 스산하게 들리는 듯한 겨울밤이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