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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문학

읽기 쉬운 영어 원서 추천,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주여, 내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와,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를"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은 위의 경건하고 아름다운 평온의 기도를 아래와 같이 세속적이고 저열한 그림과 함께 배치한다. 

 

   드레스덴 공습,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주제를 '미친놈이 서술하는 SF소설' 장르 속에 우겨넣은 이 소설은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제5도살장」이라는 무서운 제목은 제 정신이 아닌 듯 횡설수설하는 주인공과 전혀 어울리지 않고, '시간여행,' '외계인의 등장'과 같은 소재는 전쟁과 대학살이라는 주제를 다루기에 적합해보이지 않는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십자군 전쟁,' '십자가'와 같은 종교의 이미지는 경박스러운 농담과 빈정거림으로 보기 흉하게 어그러지고 만다. 

 

   그렇지만 보니것의 소설은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작가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2차 대전 당시 실제 드레스덴 공습에서 살아남은 참전병이었고, 작품의 서술자인 '나,'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 또한 그러하다. 작품은 대단히 어지러운 구성인데, 작품 속의 서술자인 '나'는 현실의 커트 보니것처럼 2차 대전을 겪고 그 경험을 소설로 재현하고자 하는 작가로 등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커트 보니것의 약력을 아는 독자라면 작품 속의 '나'와 커트 보니것이 같은 사람이라고 충분히 유추할수 있다. 즉, 실제 소설의 작가가 작품 속에 '나'로 등장하는 것이다. 

 

   1장에서는 작가로서의 '나'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2장부터는 '나'는 숨고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에 대한 서술이 시작된다. 빌리 필그림은 전쟁서사에 흔히 등장하는 영웅의 이미지와는 극단에 있는 인물로, 하는 모든 일이 허접하고 어리숙한 어딘가 모자란 것 같은 인물이다. 그렇다고 전쟁의 풍파를 겪으며 위대한 전술가로 거듭나는 인물도 아니고, 마블 시리즈에 등장하는 안티히어로(anti-hero)나 악당의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인물도 아니다. 그저 운명에 이끌려 2차 대전에 징집 당하고 대공습 속에서도 운좋게 살아남은, 굳이 따지자면 '넌히어로(non-hero)'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빌리 필그림은 실제의 커트 보니것과 작품 속의 '나'가 그랬듯, 13만명이 몰살됐던 드레스덴 대공습에서 살아남고 미국으로 돌아온다. '제5도살장'은 그가 대공습을 피해 숨어있었던 공간이자 지하 고기 저장소로 쓰였던 공간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위해 도살 당한 동물들을 저장하던 그 공간은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주인공을 살려주는 공간이 된다.   

   무자비한 폭격이 끝난 뒤 주인공이(즉, 작품 속의 '나'가, 그리고 커트 보니것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유서깊은 유럽의 도시는 사라지고 폐허와 시체만이 남아있었다. 그 허무와 절멸의 충격을 제 정신으로는 그려낼 수 없었던 것일까, 작품 속의 '나'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인 빌리 필그림을 정신병자로 재현해놓는다. 

 

   빌리 필그림은 자신이 시간여행을 한다고 믿으며, 우주인과 소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쟁 중의 과거, 미국에서 안락하게 살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를 시간여행으로 오가며, 자신이 우주인들로부터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관적" 시간관을 배웠다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설 속에서 빌리의 그런 노력은 당연히 정신병자의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참전으로 인한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발현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그 발악을 관전하면서 독자는 의문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빌리의 그 모든 경험은 작품 속의 '나'가 그려낸 허구임을 독자는 이미 알고 있고, 빌리의 인류사적 경험을 그런 식의 우스꽝스러운 허구로 그려낸 작가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왜 대학살의 경험을 경박하고 우습게 희화화하는가? 인류가 겪은 그 비극 앞에 추모와 슬픔을 표하지 않고 왜 천박한 농담을 자아내는가? 역사 속에 무자비하게 실존하는 현실을 왜 있지도 않는 비현실로 대체하는가? 

 

   그렇게 의문을 품고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슬픔이었다는 것을. 

 

   말도 안되는 충격이자 논리와 이성으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현실, 기존의 선형적인 시간관이나 사실에 기반한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재현해낼 수 없는 '비현실적인 슬픔'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 상흔이라는 것을.

 

   빌리 필그림이 벌이는 광란의 춤판은 통렬하고 비장할 정도로 볼썽 사납기에 독자는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읽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2020년의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 전쟁은 책이나 영화에서 본 역사 속의 소재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세계 많은 곳에서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때문에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 책의 부제인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 말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희생되는 것은 결국 아이들이라고.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다. 

 

   현실의 무자비함이 담담히 일상을 살아가는 무고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특별한 구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이 소설은 커트 보니것을 현대 미국문학의 거장으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고, 50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에도 모자람 없이 공명하고 있다. 

 

   작가가 무거운 주제를 경박한 언어로 풀어낸 저의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더 많은 사람이 소설을 읽고 전쟁의 참상을 알기를, 우리 역사에 아직도 서슬퍼렇게 남아있는 현실을 잊거나 외면하지 않기를, 그래서 다시는 '도살(slaughter)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