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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문학

장강명의 「표백」, 이 시대가 읽어야 하는 소설

   몇년 전 재미있게 읽은 장강명 작가의 「표백」을 요 며칠 새 두 번째로 읽었다. 첫 번째로 읽었을 때 흥미를 돋구던 부분이 지겹기는커녕 감칠맛을 더했고, 두 번째로 읽고 새로 보이는 지점들은 가히 천재적이었기 때문에 책을 덮은 어젯밤로부터 하루를 묵혔는데도 흥분이 타자를 치는 손가락 사이로 떠다니는 듯하다. 

 

   장강명처럼 한국 사회의 불안과 이 시대의 공허를 눈에 보이도록, 손에 잡히도록, 그리고 가슴을 후려치리만치 생생하게 극화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한국이 싫어서」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절망의 순한 맛 버전이었다면, 「표백」은 독하게 매운 맛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표백」의 어린 주인공들은 인터넷에 자살을 선언하고, 친구의 자살을 유도하고, 의미없는 섹스를 하고, 자살하고, 사람을 자신의 편의를 위해 이용하고, 사람을 내다버린다. 

 

   '세연'은 젊고 예쁘고 두뇌까지 비상한 부족할 게 없는 여자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간질을 앓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세연의 괴팍하고 자기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이고 불경스러운 인격이 더 극단으로 치달았을 수는 있으나, 간질이 아니었더라도 세연은 세연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표백」이 연극이라면 언뜻 보기엔 세팅이 전혀 다르지만 알고보면 거울로 비쳐진 것처럼 닮은 몇개의 무대가 번갈아가면서 1막, 2막,...을 이어가는 것 같은 구성이다. 맨 처음에는 대기업 회장의 촉망받는 장남이 미국에서 자살했다는 기사가 등장하고, 그 다음으로는 '나'가 화자로 등장해 서술하는 형식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음영 처리된 박스 안에 번호가 붙은 단편적인 글이 맥락없이 던져진다.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작가는 이렇게 서로 연결고리가 없어보이는 세 가지 형식을 독자의 눈 앞에 툭 던져놓는다.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어떻게 연결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곧 음영 처리된 박스 안의 글들은 세연이 죽기 전에 자살선언 사이트에 올리기 위해 작성한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글 속에 '재키,' '적그리스도,' '루비,' '소크라테스'와 같은 가명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제 세연과 세연의 친구들인 '나,' 휘영, 윤영 등으로 차차 밝혀진다. 

 

   '나'가 서술하는 실제 상황과 자살선언 사이트에 올라온 짧은 글들은 계속 번갈아 등장하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서로 맥락없이 던져진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서서히 보여준다.

 

   세연은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산업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거의 동시에, 그것도 이례적으로 빠르게 이루어낸 앞세대와 달리 오늘의 세대는 이 세계에 더 보탤 것이 없다. 

 

 

   이런 세계에,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난 세연의 세대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앞세대처럼 위대해질 수 없고 힘들다고 발버둥쳐봐야 배부른 소리를 징징댄다고 폄하될 뿐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고시에 합격하거나 의사가 되어서, 대기업에 들어가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할지라도 그것은 잘 '표백'되었다는 증거일 뿐이며, 이 사회의 부품으로 죽을 때까지 소모될 뿐이다. 노예제가 없어졌던 것처럼, 봉건주의가 사라지고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됐던 것처럼,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위대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 세상은 이미 너무 희도록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세연의 대척점에 있었던 '나'가 그랬던 것처럼, 독자가 세연이 주장하는 모든 말에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연은 분명히 미쳤고 극단의 극단으로 치달아 있으며, 그녀의 허무주의는 비인간적이며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작가가 그런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독자는 세연을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로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잘 '표백'되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쳇바퀴 돌리며 살아가는 이 사회의 부픔으로서, 이 소설이 비판하는 한국 사회의 저열함과 이 시대의 비정함은 처참하리만치 뼈 아프게 공감된다.  

 

   다만 그러한 한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세연과 그녀를 따른 몇몇 친구들은 인생에서 남들로부터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성취를 이루었을 때 스스로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이 한계를 처절히 거부한 것이고, '나'는 한계를 수용하고 이 세계에 적응했던 것이다. 

 

  「표백」은 묻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