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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문학

당신의 「아몬드」는 무엇인가? 오랜 동안 베스트셀러 선반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드디어 읽었다. 소설의 중반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그토록 오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이유와 근래 보기 드문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지만, 중반 이후를 넘어가면서 알 수 있었다. 「아몬드」의 줄거리를 단순한 편이다. '감정 표현 불능'이라는 정서적 장애를 가진 십대 소년이 사고로 엄마와 외할머니를 잃고 난 후 생전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성장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십대 청소년의 정체성 혼란, 친구와의 갈등과 해결,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실의 고통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겪는 성숙과 같이 성장 소설의 클리셰를 담고 있으면서도 뻔하지 않은 전개와 단단한 캐릭터 구축으로 성공한 작품인 것 같다. 지문보다.. 더보기
버지니아 울프의 환생,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넷플릭스 의 원작자로서였다. 드라마를 재밌게 보긴 했지만 굳이 원작을 찾아보고 싶진 않았고, 대신 많이 팔린 「시선으로부터」를 리뷰도 보지 않고 덜컥 주문해버렸다. 처럼 귀엽고 신선한 발상을 할 수 있는 작가의 많이 팔린 책이라면 분명히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다. 「시선으로부터」는 관악에서 영문학을 공부할 때 가장 좋아했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이 균열을 비집고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방식, 제국주의와 가해자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소재, 비선형적인 시간관, 가스라이팅을 당한 여자들, 그럼에도 자기 길을 간 여자들의 불굴의 정신력은 버지니아 울프가 8.. 더보기
캄캄한 겨울밤에 읽는 「일곱 해의 마지막」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에 나온 장편, 김연수 작가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이틀에 걸쳐 다 읽었다. 어젯밤에 첫 20페이지 정도를 읽고 잠들었다가 오늘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됐다. 캄캄한 겨울밤을 연상하게 하는 이 소설을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고 이끌어가고 끝냈을지 상상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겨울밤, 아무도 없이 혼자 숲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을까. 그런 고요와 고독 속에 겸허히 침잠해 들어갔을 작가의 용기와 노고에 독자는 마음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다. 김연수 작가도 이렇게 먹먹한 독자의 마음으로 시인 백석의 삶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작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용기를 내고, 그런 고독을 감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 더보기
김금희 작가가 독자의 마음을 찬찬히 보듬어주는 소설, 「경애의 마음」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부터 좋아했던 김금희 작가의 첫 장편을 출간된 지 2년이나 지나서야 읽게 됐다. 「너무 한낮의 연애」를 재밌게 읽어서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품인 「너의 도큐먼트」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장편이 나오면 꼭 읽어봐야지, 했었는데 외국인 근로자로 해외에 살다보니 늦어지게 됐다. 「경애의 마음」은 우리 주변에서 본 것 같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은 공상수라는 남자와 박경애라는 여자 두 사람이다. 연애소설이라면 연애소설일 수도 있겠지만, 장르로 한정짓기에는 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주 좋은 작품이다. 상수와 경애는 모두 30대 후반으로 '반도미싱'이라는 제조업체에서 '팀장대리'와 '주임'으로 근무하는 직장 동료다. 덩치값을 못하고 늘 허둥지둥에 긴장의 공백을 주저리주저.. 더보기
코로나 시대에 읽는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는 1940년대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전쟁의 메타포로 쓰였지만 2020년의 코로나 시대를 마치 예견한 것처럼, 현재의 전쟁같은 면면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전염병의 시작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비효율적인 행정과 자발적으로 전염병에 싸우기 위해 나서는 시민들, 전염병으로 인한 고립과 격리, 그로 인한 사람들간의 갈등과 소외, 약탈과 방화, 끊임없는 죽음과 일상이 되어버린 매장(burial). 2020년의 현재를 살아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묘사에 경이로울 때가 있었다. "그들은 그 수렁과 절정의 중간 거리에 좌초하여, 갈 바 없는 그날그날과 메마른 추억 속에 버림받은 채, 고통의 대지 속에 뿌리박기를 수락하지 않고서는 힘을 얻을 수 없는, 방황하는 망령으로, 산다기보다는 차라리.. 더보기
읽기 쉬운 영어 원서 추천,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주여, 내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와,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를"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은 위의 경건하고 아름다운 평온의 기도를 아래와 같이 세속적이고 저열한 그림과 함께 배치한다. 드레스덴 공습,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주제를 '미친놈이 서술하는 SF소설' 장르 속에 우겨넣은 이 소설은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제5도살장」이라는 무서운 제목은 제 정신이 아.. 더보기
장강명의 「표백」, 이 시대가 읽어야 하는 소설 몇년 전 재미있게 읽은 장강명 작가의 「표백」을 요 며칠 새 두 번째로 읽었다. 첫 번째로 읽었을 때 흥미를 돋구던 부분이 지겹기는커녕 감칠맛을 더했고, 두 번째로 읽고 새로 보이는 지점들은 가히 천재적이었기 때문에 책을 덮은 어젯밤로부터 하루를 묵혔는데도 흥분이 타자를 치는 손가락 사이로 떠다니는 듯하다. 장강명처럼 한국 사회의 불안과 이 시대의 공허를 눈에 보이도록, 손에 잡히도록, 그리고 가슴을 후려치리만치 생생하게 극화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한국이 싫어서」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절망의 순한 맛 버전이었다면, 「표백」은 독하게 매운 맛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표백」의 어린 주인공들은 인터넷에 자살을 선언하고, 친구의 자살을 유도하고, 의미없는 섹스를 하고, 자살하고, 사람을 자신의.. 더보기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 중 <모래로 지은 집>과 <아치디에서> 최은영 작가는 어렵고 불편한 말을 쓰지 않고도, 도리어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여린 말로 너와 나 사이의 불편한 상처,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의 균열과 그것을 극복해내려는 애처로운 갈급함을 표현해낸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 나의 인력으로 행여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될까봐 두려워 뒤로 걸었다. 알고 있는데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