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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문학

버지니아 울프의 환생,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자로서였다. 드라마를 재밌게 보긴 했지만 굳이 원작을 찾아보고 싶진 않았고, 대신 많이 팔린 「시선으로부터」를 리뷰도 보지 않고 덜컥 주문해버렸다.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귀엽고 신선한 발상을 할 수 있는 작가의 많이 팔린 책이라면 분명히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다. 

 

 

  「시선으로부터」는 관악에서 영문학을 공부할 때 가장 좋아했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이 균열을 비집고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방식, 제국주의와 가해자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소재, 비선형적인 시간관, 가스라이팅을 당한 여자들, 그럼에도 자기 길을 간 여자들의 불굴의 정신력은 버지니아 울프가 80년 전 장편소설 「막간」, 「댈러웨이 부인」 등에서 구현해냈던 세계의 그것들과 꼭 닮아 있었다. 

 

 

   작가가 버지니아 울프를 베꼈다거나 따라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다만 버지니아 울프가 한국에서 환생한다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버지니아 울프의 몹시 한국적인 해석이라 느껴지는 작품이었다는 말이다. 

 

   책은 아래와 같이 '심시선 여사'가 중심이자 시초가 되는 가계도를 맨 처음에 보여준다. 아버지, 남성 중심의 가계도에 익숙한 우리 모두에게는 어딘가 약간 이상하고 어색한 것 같아 보이는 가계도. 

 

 

   가계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단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책 속에서 자기의 목소리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이 목소리와 이야기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듯 이루지 못하는듯 평행을 이루면서도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진다. 

 

   심시선 여사는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견뎌낸 여성으로, 소설의 현재 시점에서는 이미 십년 전에 죽은, 주인공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이다. 그녀는 전쟁 통에 가족을 잃고 하와이로 이민을 가게 된다. 하와이에서 우연히 만난 독일인 화가의 눈에 띄고, 그녀를 화가로 키워준다는 말을 믿고 그를 따라 유럽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젊은 그녀가 마주한 것은 새로운 삶이나 교육의 기회가 아니라 괴팍한 화가의 시녀이자 가정부 노릇이었고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 '요제프 리'라는 이름의 첫 남편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녀는 그림 대신 글로 진로를 바꿔, 파란만장한 사생활과 예술에 대한 평론을 팔아 자식들을 먹여살린다. 그녀의 파격적인 언행과 당당한 태도는 세상에는 가십거리가 되고 그녀에게는 먹고 살게 하는 밥줄이 된다. 

 

   31개로 이루어진 소설의 모든 챕터는 심시선 여사가 썼던 글이나 인터뷰의 일부분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남긴 말과 그녀가 살아간 삶의 궤적은 현재를 살아가는 그녀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함께 한다. 

 

 

   버지니아 울프에게도, 정세랑에게도 페미니즘이라는 틀을 씌우고 싶진 않다. 어떤 이야기를 '~ism,' '~주의'라는 박스 안에 가두는 것이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시대를 거치며 그 모양만 바꾸고 여전히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폭력 앞에 어쩔 수 없는 약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점, 여자들이 대를 이으며 감내해 온 세상의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 그 폭력의 비정함을 이겨내려는 불굴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자의 역사와 존재에 집중하게 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거대하고 체계적인 폭력 앞에 피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피해자는 항상 여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짓밟힌 피지배국가들과 그 땅, 약탈당한 그 민족들, 주류 권력에 의해 프레임 씌워지고 누명을 쓴 사상가들, 능력주의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회부적응자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성소수자들, 국적 혹은 피부색이 달라서 차별받는 이방인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싸움일뿐, 여자 대 남자 혹은 정상 대 비정상, 우리 대 그들의 싸움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아직 몸도 마음도 무르고 여릴 때 배웠던 것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가 보석처럼 단단히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