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안 베스트셀러 선반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드디어 읽었다. 소설의 중반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그토록 오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이유와 근래 보기 드문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지만, 중반 이후를 넘어가면서 알 수 있었다.
「아몬드」의 줄거리를 단순한 편이다. '감정 표현 불능'이라는 정서적 장애를 가진 십대 소년이 사고로 엄마와 외할머니를 잃고 난 후 생전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성장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십대 청소년의 정체성 혼란, 친구와의 갈등과 해결,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실의 고통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겪는 성숙과 같이 성장 소설의 클리셰를 담고 있으면서도 뻔하지 않은 전개와 단단한 캐릭터 구축으로 성공한 작품인 것 같다.
지문보다 대사가 훨씬 많고 기-승-전에 이르기까지 챕터마다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는가하면 예기치 못한 전개가 이어지기 때문에 독서를 즐기지 않는 초보 독자라도 지루하지 않게 따라갈 수 있으면서도, 마침내 결에 이르러서는 고전(classic)이 주는 감동까지 있다. 플롯보다는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와 내적인 성장이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나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도 했다.
「아몬드」를 재밌게 읽은 독자이자 아이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찾는다면 「자기 앞의 생」을, 좀 더 본격적인 소설에 도전하고 싶다면 「채식주의자」를 추천하고 싶다.
「아몬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당연히 주인공이자 이 소설의 1인칭 화자인 '선윤재'와 그의 친구 '곤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표현하는 것이 선천적으로 불가능한 윤재와 달리, 곤이는 끓어넘치는 열등감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수도, 감출 수도 없는 정반대의 캐릭터이다. 얄궂은 악연으로 얽혀있으면서도 윤재와 곤이는 '서로의 다름'에 이끌리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결국엔 윤재가 목숨을 바쳐 곤이를 지키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감정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하고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감정을 얻기 전의 윤재는 심하게 결핍되고 왜곡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윤재의 엄마가 그에게 '보통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법을 공식처럼 가르친 이유나, 할머니가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던 이유, 결국 드러난 그의 본 모습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와 다르다고 배척하는 이유 또한 그가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윤재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지만,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윤재에게 점차 적응하고 그의 내러티브와 감정 변화를 따라가면서 독자는 윤재에게서 자기자신을 보기도 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함'이라는 결핍을 가진 윤재처럼, 사실상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라도 결핍하고 있고, 완벽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캐릭터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게 동조할 수 있고, '공감'마저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독자가 윤재에게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은, 윤재가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가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해지고 싶어'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곤이를 만나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를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결국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독자는 알게 된다. 그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감정'이라는 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도, 결국 윤재는 원하던 것을 얻게 된다. 곤이는 '감정'이라는 틀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던 윤재를 이끌어주는 존재이자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어준다.
곤이가 (윤재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면, 가장 눈에 띄는 소재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몬드'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윤재의 선천적 장애를 조금이라도 치유하기 위해 삼시 세끼 아몬드를 먹인다. 윤재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이유는 편도체의 크기가 작기 때문인데 "크기도, 생긴 것도 딱 아몬드 같"(p. 29)기 때문에 윤재는 자신의 편도체를 아몬드라고 부른다.
즉, 아몬드는 윤재의 결핍, '감정 없음'이라는 장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소재이다. 그 결핍을 직면하고 해체하고 극복하는 과정, 그 과정을 초조하게 지켜보면서 독자는 생각하게 된다. 나의 아몬드는 무엇인가? 그것이 선천적인 장애이든, 후천적인 상실이든, 열등감이든, 혹은 살면서 맛본 실패나 좌절감이든, 저마다의 '아몬드'와 싸우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아몬드」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아몬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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